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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채식주의자, 남성성에 대한 고찰, 기성세대를 위한 작은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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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초에, 해외 컨퍼런스를 갈 일이 있어서, 장거리 비행을 하면서 채식주의자를 읽게 되었다. 

소설을 너무나 오랜 만에 읽는 참이라, 집중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책을 피자마자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사실 되게 엉덩이 아프고 눈아파서 그만 읽고 싶었는데, 끝까지 내용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약간 대충 대충 넘겨가며 읽었다 ㅋ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기도 했고, 내용 자체가 자극적이기도 했던 지라, 신선했다.

무엇보다 정작 가장 핵심인물인 주인공 여자의 내래티브는 전혀 없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 사람의 시각 차이 라던지, 그 세사람의 그들만의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과정이 참 재밌었고,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주인공이 정신을 놓아가는 과정(?)이 처음에는 갑작스럽고 극단적이지만 뒤로 갈수록 그 묘사가 실감이 났다고 해야 하나? 


여튼 나름의 감상평을 간직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한국도 미국도 아닌 독일에서 만난 오랜 친구와 감상평을 나누게 되었다. 

내 친구는 극단적인 남성캐릭터에 대해 이야기 했고, 나는 그저 신선했다는 감상평을 나누었는데,

집에 돌아온지 몇주 만에 더럽게 잠이 안와서 짜증이 잔뜩나던 날, 잠들려고 애쓰며 침대에 누운 채 채식주의자의 감상평을 다시 떠올려보게되었다. 


책에 나오는 남성캐릭터는 확실히 극단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들이 주인공 여자캐릭터를 변해가게 만든 장치였다고 이해했고, 또 솔직히 으례히 남성캐릭터의 폭력성을 당연시 여겼다. 사실 지금도 나에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성성은 폭력성을 포함한다. 일반화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동안 접해온 남자다움이라던지 남성의 특징이라던지 (특히 한국사회에서? 음 근데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 적어도 나는) 하는 것들이 사실은 폭력성에 가깝지 않았던가. 


남자는 성욕을 참기 힘들다거나, 공감을 어려워 한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특징 뿐 아니라

울어도 안되고, 져도 안되고, 승부욕도 강해야하는 다소 강압적인 매력어필 까지


그들은 그렇게 살길 강요받는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는 그들로 부터 종종 두려움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나의 개인적 경험을 되돌아 보게되었는데, 내 주변의 가장 가까운 남자들의 성향들이 그 언급된 강압적인 남성성에 가까움을(혹은 억압당해왔음을?) 깨달았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인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내 동지인 남편까지. 


가장 가까운 가족인 이 세 남자의 특징은 셋 다 다혈질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오빠에게 워낙 험하게 훈육(?)받고 컸기 때문인지, 자상하셨지만 호랑이 같았던 아부지 때문인지, 나에게 남자란 캐릭터는 은연 중에 강하고 무섭다라는 게 각인이 됫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다른 다양한 성격의 남자 사람들을 봐오긴 했지만 (절대 오빠나 아빠 같은 남자 안만날거라고 해놓고) 한 성질 하는 지금의 남편과 만난걸 보면 남자는 무섭지만 강하기에 이 사람이 날 지켜줄거라고 생각했는지도? (근데 결혼은 또 다르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모습만 보이고 측은지심드는게 부부인듯, 이 얘긴 나중에 또) 여하튼 확실한 건 세 사람 다 운전을 겁나 무섭게 한다는 거다 (읭?).


여하튼 나의 경험을 돌이켜 보며 느낀것은, 내가 남자 그리고 남성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였다. 나와 이야기 나누었던 친구의 남성에 대한 경험은 잘은 몰라도 아마 나와는 또 매우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친구의 환경과 성격은: 정말 가정적이고 친구같은 아버지와 여장부같은 어머니 그리고 친구같은 언니가 있고, 그녀 자체도 어디가서 남자한테 겁먹을만 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채색주의자의 다소 폭력적인 남자캐릭터들이 소설적 장치라 하더라도 분명 극단적이게 묘사된 부분이 있음에도 사실 크게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참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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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성성과 여성성, 생각도 많고 할말도 많지만, 그 중에도 글로 남기고 싶은 화두가 하나 떠올랐다. 

(정치 노선과 별개로) 사고 하는 방식이 보수적이고 평화주의자 (양비론자에 가깝기도?)인 나의,  '상투적인 성별다툼'에 대한 개인적인 반론이랄까. 


일례로 쿨녀가 되려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종종 얘기하는 쿨한 여자란 사실은 남자들 본인들이 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캐릭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Gone Girl 이라는 스릴러 영화에서도 아주 공포스러운(?) 스토리로 다뤄졌다. 재밌다 ㅋ) 

그런데 나의 짧은 남녀관계 역사를 뒤 돌아 봤을때, 나 역시 항상 쿨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남성에 의한 억압인지도 모른다. 일부 (혹은 많은) 여성들이 그런 점을 꼬집기도 한다. 어떤 부분에선 맞을 것이다. 

특히나 개개인의 연애사를 넘어서 사회적인 강요로까지 확대된다면 그건 문제가 맞다. 


그런데 어떤 면에선 개인의 사적영역을 너무 크게 보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쿨녀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되고 싶다. 

나의 주요 동기는 남성을 맞추고 싶은게 아니라. 내가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해해보고 싶고, 노력해 보고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덜 의존하고 싶고 그를 더 자유롭게 해주고 싶고 그래서 나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진심에 의해서 내 곁에 있길 바란다. 그럼에도 내가 무의식적인 억압에 눌려있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내가 남성을 맞추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나는 아마도 자상한 남자가 되려고 노력했을 거다. 

(실제 얼마나 자상한지와는 별개로 노오력할거라고....지금과 마찬가지로...ㅋㅋ) 

왜냐면 상대를 사랑하니까 상대를 이해하고 싶고 맞춰주고 싶으니까.


전체적인 비율로 따졌을 때,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헌신하는 비율이 남자가 여자에게 헌신하는 비율 보다 훨씬 높을 거다. 이건 문제가 맞다. 그리고 그러한 비율 = 사회적 분위기 를 이용해서 여성에게 그런 헌신을 강요한다면 그건 폭력이 맞고 불평등이 맞을 거다. 

그렇지만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파트너로 배우자로써 상대를 사랑해서, 

단순히 내가 여자라서, 내가 남자라서가 아닌 

이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이해해주고 싶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그 관계의 제3자가 '불평등'이라고 재단해버린다면 당사자들은 상당히 마음이 아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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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니, 또 문득 내 나이 이제 겨우 (만) 서른이 되었으나 나는 어쩌면 기성세대에 첫발을 들인게 아닐까 싶어졌다.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하고 문제 해결과 반성을 촉구하는 젊은이들의 외침이 변화의 원동력이기에 나는 분명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가끔은 위에 써내려간 것처럼 '사는게 다 그렇게 단순하게 옳다/그르다로 판단되고 또 뒤집어 엎어버릴 수 있는게 아니더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예를 들어, 주변 친구들이나 나나 인터넷으로 보는 막장 사연이나,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겪는 말도 안되는 불평등도 사실은 분노의 시발점이고 척결의 대상으로 까지 느껴지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부모를 처단(?)하고 모든 집안일과 재산기여도를 1의 오차도 없이 50:50으로 나눠라 라고 할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제아무리 구시대적일 지 언정 당장 하루만에 갖다가 버리기는 힘들단 거지. 

점진적으로, 이해와 포용이라는 무한한 인내심과 바람직한 해결방식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바꿔나가는게, 매일 매일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할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이 세상 모든 역사가 하루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러나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기에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런 식의 사고 자체가 내가 현실이라는 세상과 타협을 해나가고 있다는 반증으로 느껴져서 아마 나는 기성세대에 첫발을 들인 것 같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루 하루 더 많은 책임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어른에게 현실과의 타협은 때로는 굴욕적이지만 필수 불가결일 수도 있겠다. 그 어른들이 '포기'를 해버린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변화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다면 그들의 타협은 어쩌면 지혜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나는 점점 더 기성세대 같아지는 ( or 질 것만 같은) 나자신을 변호하고 싶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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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나 저래나 나는 여전히 그 어떤 것도 흑과 백으로 옳다 그르다로 무자르듯 판단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양분법 dichotomy란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해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혹은 누군가의 생각을 판단하고 재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 와 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로그를 재단장해야하는데 블로그 플랫폼이 맘에 안들어서 옮기고 싶기도 한데 여기 쓴 글을 잃고 싶진 않고, 또 너무 여기저기 흔적 찔끔 찔끔 싸질러두기도 싫고... 여튼 조만간 꼭 재단장하고 돌아온다. 커밍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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